검을 든 악녀에게 예의를 갖춰라
반호흡 · 49화
무협지 속 독설로 미움받다 일찍 죽는 악녀 위지란. 죽음이 예정된 첫날 밤, 대륙 제일의 검과 정직한 독설로 원작이 틀렸음을 증명한다.
눈을 떴더니 쉰 명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전이었다. 향 냄새, 검은 관모, 무릎을 꿇으라는 고함. 머릿속으로 남의 기억이 밀물처럼 들어차는 중이었고, 그 틈에 내 기억도 멀쩡히 살아 있었다. 어젯밤의 나는 이불 속에서 무협지 완결권을 덮고 잠든 사람이었다. 제목도 기억난다. 지금 이 장면도 기억난다.
서장이다. 악녀 위지란이 만인 앞에서 망신당하는 대목. 그리고 이 여자는 오늘 밤을 못 넘긴다.
"위지 소저는 어찌 사죄가 없는가!"
상석의 노인이 탁자를 내리쳤다. 곽 장로. 원작에서 '덕망'이라는 두 글자가 이름보다 자주 붙던 양반이다.
몸의 기억이 먼저 대답해 왔다. 그 덕망의 창고에서 구휼미 삼백 석이 비었고, 그것을 입 밖에 낸 죄가 오늘의 이 문책이라고.
독자였을 때 나는 이 대목을 대충 넘겼다. 악녀가 맹의 어른을 모독해 벌을 받는다기에 그런가 보다 했다. 당사자 자리에 서 보니 같은 문장이 다르게 읽혔다.
"사죄라."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낮고 잘 벼려져 있었다. "좋아. 결론부터."
대전이 조용해졌다.
"모독이 되려면 거짓이어야지. 창고 장부는 내가 쓴 게 아니라 맹의 서기가 썼고, 빈 삼백 석도 내가 비운 게 아니라 장부가 비웠다. 그럼 남는 죄목은 하나뿐인데." 나는 곽 장로의 눈을 똑바로 봤다. "어른의 체면을 사실로 찔렀다는 것. 노인장, 강호의 법도는 언제부터 사실을 베었나."
"저, 저런 무엄한."
"방금 그 호통, 길었지만 사실은 넉 자야." 나는 손가락 네 개를 폈다. "나는 급하다."
곽 장로의 낯빛이 향로의 재 색으로 바뀌었다. 대전 구석에서 누군가 숨을 잘못 삼키는 소리가 났다.
"무, 무엄한 것이 어디서 감히 맹의 어른을."
왼편에서 젊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곽 장로의 제자다. 몸의 기억이 이름까지 내밀었지만 받지 않았다.
"감히." 나는 그쪽으로 고개만 돌렸다. "그 말은 아래가 위를 벨 때 쓰는 거다. 사실이 체면보다 아래였던 적은 강호가 생긴 이래로 없어. 너는 지금 어른을 위하는 게 아니라 어른의 창고를 위하고 있고."
젊은 제자의 입이 열린 채로 굳었다. 반박이 늦으면 그건 반박이 아니라 인정이다.
대전의 침묵이 결을 바꿨다. 아까까지는 나를 누르는 침묵이었는데, 지금 것은 저희끼리 눈치를 재는 침묵이었다. 쉰 개의 시선이 나와 곽 장로 사이에서 갈 곳을 정하지 못했다.
재미있는 것은 내 심장이었다. 뛰지 않았다. 쉰 명 앞에서 어른을 들이받는 중인데 손끝 하나 떨리지 않았다. 전생의 나는 회의실에서 손을 드는 데에도 십 분이 걸리던 사람이었는데. 이 몸은 만인의 적의 앞에서 맥박이 평보를 걷는다.
몸이 담이 큰 건가, 아니면 이 정도는 위협 축에도 못 든다는 건가.
악녀 위지란. 원작은 이 여자를 두고 '독설로 강호의 미움을 산 여인'이라고 썼다. 당사자가 되어 보니 알겠다. 이 여자가 산 것은 미움이 아니라 빚이다. 맞는 말을 한 값을, 여태 강호의 누구도 치르지 않았을 뿐.
그 빚, 오늘부터 내가 받아 낸다.
문책은 흐지부지 끝났다. 벌은 폐관 삼 일. 구휼미 얘기가 더 나오는 게 무서웠던 모양이다.
회랑을 걸어 나오는데 몸이 이상했다.
세 걸음마다 눈이 멋대로 거리를 쟀다. 기둥까지 두 걸음 반, 처마의 사각까지 일검지간, 등 뒤의 시선은 셋이되 살기는 없음. 재려고 잰 것이 아니었다. 숨 쉬듯이 재어졌다.
시험 삼아 걸음을 반 박자 늦춰 보았다. 눈은 그 사이에 회랑 끝 담장을 훑었고, 몸은 도약에 드는 호흡을 내밀었다. 반 호흡이면 족하다고. 담장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답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이 몸이 문제였다. 경공이라는 두 글자가 머릿속 무협지에서 걸어 나와 발바닥에 붙어 있었다.
원작 어디에도 위지란이 강하다는 문장은 없었다. 독설, 오만, 미움. 그 여자를 만든 글자는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 몸은 걸음마다 검의 거리를 긋고 있었다. 문장에 없던 것이 몸에는 있었다.
없던 게 아니라, 안 쓴 거라면.
작가가 안 쓴 건지, 아무도 물어봐 주지 않은 건지. 그 답이 어디 적혀 있는지 나는 아직 몰랐다. 다만 오늘 밤이 지나면 최소한 한 명은 알게 된다. 이 몸의 주인이 얼마나 강한지. 하필 그게 나라서, 유감은 저쪽 몫이다.
"소저, 괜찮으세요?"
처소 앞에서 시비 연심이 달려 나왔다. 열여섯, 몸 주인의 기억이 알려 준 이름. 대전에서 잘못 삼킨 숨소리의 주인이기도 했다.
"괜찮아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연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에 든 찻반이 기울어 잔이 미끄러질 뻔했고, 나는 반보 나가 잔을 받았다. 받고 나서야 알았다. 잔이 기울기 전에 손이 이미 나가 있었다.
"소, 소저가 왜 존대를."
"그쪽이 하대 들을 일을 안 했으니까요."
몸의 기억을 뒤져 봐도 이 아이는 야단맞는 쪽이었다. 찻물이 식어서, 걸음이 굼떠서, 눈을 마주쳐서. 위지란의 독설은 위아래를 가리지 않았고, 그래서 강호는 그녀의 말 중에 맞는 말이 얼마나 많은지 셀 필요가 없었다. 아래를 문 이빨은 위를 문 이빨까지 전부 무는 버릇으로 만들어 준다.
아깝게 됐다. 이빨은 방향만 고치면 쓸 만한데.
"아까, 대전에서." 연심이 찻반을 끌어안고 우물거렸다. "속이 시원했어요. 죄송해요, 이런 말."
"죄송할 건 그쪽이 아니라 저쪽이죠." 나는 대전 방향으로 턱을 까딱했다. "들어가서 쉬어요. 오늘 밤엔 무슨 소리가 나도 내 방에 오지 말고."
"소리요?"
"쥐가 좀 다닐 거예요. 큰 쥐가."
마지막 말은 계획이었다. 연심은 그것도 모르고 웃으며 물러갔다. 웃는 낯이 아직 야단맞기 전의 아이 같아서, 나는 그 등에 대고 속으로만 한 줄을 보탰다. 다음에 잔이 미끄러지면 그건 그쪽 잘못이 아니라 찻반 잘못이에요.
방에 들어와 나는 원작을 꺼냈다. 종이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서장의 끝. 문책당한 악녀는 그날 밤 처소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자진으로 처리되고, 강호는 사흘 만에 그녀를 잊고, 이야기는 주인공들의 봄으로 넘어간다. 범인은 끝까지 안 나온다. 작가가 잊었는지, 처음부터 아무래도 좋았는지.
독자였던 나도 아무래도 좋았다. 조연의 죽음은 페이지가 가볍다.
당사자가 되니 무게가 다르다.
도망칠까. 담을 넘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도망친 악녀의 이야기는 원작에 없다. 없는 길을 밤에, 지리도 모르고, 추격을 달고 걷는 것과. 아는 사건을 아는 자리에서 기다리는 것.
살 길은 후자가 가깝다.
그리고 하나 더. 도망치면 저쪽은 실패를 모른다. 실패한 줄도 모르는 자는 다음에 더 조용히 온다. 기다렸다가 정면으로 받아 주면, 최소한 보낸 자의 밤에 '실패' 두 글자가 박힌다. 사람을 죽이라 보내 놓고 실패를 보고받는 밤. 그 밤이 어떤 얼굴일지 나는 꽤 궁금했다.
전생의 나라면 도망쳤다. 회의실에서도 도망치던 사람이니까. 화가 나면 집에 와서 이불에 대고 할 말을 복기하던 사람. 그 복기들은 전부 어디로 갔을까. 어쩌면 여기로 왔는지도 모른다. 할 말을 삼 년 치쯤 쌓아 둔 사람과, 할 말을 다 하고 미움을 산 몸. 조합치고는 나쁘지 않다.
나는 등잔을 끄지 않고 침상 옆에 검을 눕혔다. 몸이 그 위치에 만족하는 게 느껴졌다. 손잡이까지 반 호흡. 이 몸의 반 호흡이 얼마나 짧은지는, 곧 알게 되겠지.
기다리는 동안 나는 몸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위지란. 원작의 너는 여기서 끝이었다. 자진이라는 두 글자로 정리되고, 사흘 만에 잊히고, 네가 물었던 삼백 석은 영영 대답을 못 들었지.
대답은 없었다. 대신 검 손잡이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감각이 있었다. 대답으로 치기로 했다.
자시가 기울 무렵, 등잔불이 까닭 없이 흔들렸다.
바람이 아니었다. 문풍지 아래로 스미는 공기의 결이 달랐다. 무인의 처소에 소리 없이 스미는 것은 셋뿐이라고, 몸이 먼저 알고 머리가 뒤따랐다. 달빛과, 한기와, 살기.
문이 열렸다. 경첩은 침묵했다. 어둠 한 자락이 사람의 형상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지면에 붙다시피 깔렸고, 다음 찰나 비수가 파공성도 없이 목젖을 노려 떨어졌다. 무성의 쾌. 상승 살수의 수법이었다.
빠르다, 하고 독자의 내가 감탄했다.
느리다, 하고 몸이 대답했다.
찰나가 실처럼 풀렸다. 떨어지는 비수의 날 위로 등잔불이 흘렀다. 살수의 발끝이 딛는 마루널, 널이 울기 전에 옮겨 가는 무게, 들숨이 멎는 지점까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읽혔다. 그리고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챙.
짧은 검명이 방을 갈랐다. 침상 곁에 눕혀 둔 검이 반 호흡 만에 일어서서 비수를 받아넘긴 소리였다. 비수는 검면의 유를 타고 미끄러져 허공을 베었고, 벤 힘이 다하기도 전에 손목이 뒤집히며 검이 되감겼다. 물이 소용돌이를 말듯 부드럽게, 그러나 강철의 골기로. 살수의 완맥이 검첨 아래 잡혔다. 내력을 겨룰 것도 없었다. 일검지간에 든 순간 이미 끝나 있던 승부를, 살수 홀로 몰랐다.
방금 그 되감는 검로, 이름이 혀끝까지 왔다가 사라졌다. 몸은 아는데 나는 모르는 이름이었다.
복면 아래로 호흡이 무너졌다. 밤공기에 식은땀 냄새가 번졌다. 조금 전까지 이 방의 어둠은 저자의 것이었는데, 지금은 등잔불 반 자 밖까지 전부 내 검역이었다.
복면 위의 눈이 나를 봤다.
확신이 지워지는 것을 나는 그 눈에서 처음 구경했다. 죽으러 온 게 아니라 죽이러 왔다는 확신. 그것이 눈 깜빡할 사이에 재가 되어 내렸다. 자신이 몇 수 아래인지 세어 볼 엄두도 못 내는 눈이었다.
"오늘 밤 일정이 어땠는지 맞혀 볼까." 나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들을 사람은 어차피 하나뿐이다. "문책으로 기를 꺾고, 폐관 삼 일로 사람을 떼어 놓고, 자진할 만한 밤에 자진으로 보이게. 장부가 깔끔해. 쓴 사람 손버릇이 보일 만큼."
살수의 팔이 내 검 아래에서 떨렸다. 도주로를 재는 떨림이었다. 문까지 세 걸음, 창까지 두 걸음. 재 봐야 소용없다. 그 두 길 전부, 내 검역 안이다.
"결론부터." 나는 검끝을 반 치 낮췄다. "누가 보냈는지는 네가 말 안 해도 돼. 어차피 사실은 하나뿐이라."
서장의 끝에서 위지란은 죽는다. 원작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원작이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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