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의로 죽고, 은발 의녀로 깨어났다
야간당직 · 168화
과로로 쓰러진 외상외과 의사 이서린이 몰락한 의가의 은발 의녀로 깨어나, 죽어가는 대장군 강현을 현대 의술과 비밀의 문으로 살려내는 의학 환생 로맨스.
## 제1화. 환생
심장이 멎기까지 4분.
이서린은 그 4분을 한 번도 내준 적이 없었다.
"출혈점 잡았어요. 석션. 거즈 더."
복부가 열린 채였다. 손가락 사이로 더운 것이 차올랐다가 빠졌다. 비장이 터져 있었다. 그 아래 어딘가에서 피가 새고 있었고, 그녀의 일은 그 어딘가를 찾아 손가락으로 막는 것이었다. 모니터가 비명을 질렀다. 수축기 육십, 오십. 떨어지는 중이었다. 사람의 몸은 정직해서, 피가 빠지는 만큼만 살아 있었다.
"한 팩 더. 빨리."
누군가 수혈백을 짰다. 붉은 것이 관을 타고 환자에게 들어갔다. 서린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죽으니까. 그게 전부였다. 이 방 안에서 그녀가 아는 것은 그 하나뿐이었다. 누가 기다리는지, 바깥이 밤인지 새벽인지, 그런 건 이 방의 일이 아니었다.
손끝에 박동이 닿았다. 끊어질 듯, 그래도 닿았다.
"…돌아왔다."
뒤에서 누군가 길게 숨을 뱉었다. 서린은 뱉지 않았다. 아직 배를 닫지 않았으니까. 돌아온 맥은 언제든 다시 떠날 수 있었다. 그녀는 떠나는 쪽을 더 많이 봐 왔다.
봉합을 마치고 장갑을 벗었을 때, 벽시계는 새벽 네 시를 가리켰다. 스물여섯 시간째였다. 어젯밤 실려 온 다발성 외상이 셋. 둘을 살렸고, 하나를 보냈다. 보낸 하나의 이름을 그녀는 아직 외우고 있었다. 김민준, 열아홉. 오토바이. 도착했을 때 이미 동공이 풀려 있었다.
그게 버릇이었다. 살린 사람은 잊고, 못 살린 사람만 외웠다. 외우는 게 사죄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냥, 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살리는 데에는 이유가 필요 없었지만 보내는 데에는 늘 이유가 따라붙었다. 더 빨랐다면. 한 팩만 더 일찍 걸었다면. 그 이유들을 그녀는 가방처럼 들고 다녔다. 무거운 줄도 모르고, 내려놓을 줄도 모르고.
전공의 사 년, 펠로우 이 년. 그동안 그녀를 기다린 사람은 없었다. 명절에도 콜이 울리면 갔고, 생일에도 수술방에 있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사람을 멀어지게도 한다는 걸, 그녀는 오래전에 셈을 끝냈다. 손에 익은 건 사람의 안쪽이었지, 바깥이 아니었다.
수술실 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복도의 형광등이 길게 늘어졌다. 손에서 아직 비누 냄새가 났다. 며칠을 그렇게 살았다. 사람을 열어 보고, 닫고, 다시 여는 일을. 잠은 의자에서 토막으로 잤고 밥은 선 채로 삼켰다.
발이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 벽이 기울었다. 아니, 그녀가 기울었다. 바닥이 빠르게 올라왔다.
차가웠다. 누군가 이름을 불렀다. 선생님, 선생님. 멀었다. 점점 더 멀었다. 천장의 불빛이 작은 점으로 졸아들었다.
사람을 수백 번 살려놓고, 정작 제 맥은 한 번도 짚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어두워졌다.
***
흔들렸다.
처음엔 들것인 줄 알았다. 이송 중인가. 누가 나를 어느 병원으로 옮기나. 모니터 소리를 찾았지만 없었다. 링거 줄의 당김도 없었다. 대신 나무가 삐걱였다.
눈을 떴다.
천장이 낮았다. 나무였다. 발(簾)이 드리워져 좌우로 흔들렸고, 그 틈으로 흙길과 마른 갈대가 느리게 지나갔다. 가마였다. 그녀는 좁은 가마 안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었다. 무릎이 시렸다. 옷이 얇았다.
손을 들어 올렸다.
작았다. 손톱 밑에 거뭇한 약물이 배어 있었다. 코로 가져갔다. 당귀, 감초, 그 아래 낯선 풀 냄새들. 이 손은 약을 다뤘다. 손바닥의 굳은살이 그녀의 것과 달랐다. 메스를 쥐던 자리가 아니라, 약절구를 누르던 자리였다.
그녀의 손이 아니었다.
기억이 밀려들었다. 남의 기억이 제 것인 양 안으로 들어찼다. 막을 수도 추릴 수도 없이, 한꺼번에.
서린. 이름이 같았다. 이 몸의 주인도 서린이었다. 몰락한 의가(醫家)의 딸. 죄인의 핏줄. 아비는 십 년 전 어의(御醫)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와 옥에서 죽었다. 무슨 약을 잘못 올렸다던가. 누구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던가. 남은 식솔은 도성 밖 변두리로 쫓겨나 약초를 캐며 숨죽여 살았다. 어미는 손끝이 갈라지도록 일했고, 어린 동생은 늘 배를 곯았다.
그리고 어젯밤, 이 몸의 서린은 강에 몸을 던졌다.
목 끝에 찬물의 감각이 아직 남아 있었다. 숨이 막히던 자리. 차가웠겠지. 더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이서린은 죽어서 이 몸으로 들어왔고, 이 몸의 서린은 죽어서 자리를 비웠다. 둘 다 죽어서, 하나가 살아남은 셈이었다. 누가 누구의 자리를 빼앗은 것인지, 그건 지금 따질 일이 아니었다.
무섭다거나 기막히다거나, 그런 건 나중이었다. 그녀는 늘 그랬다. 감정은 처치가 끝난 뒤에 왔다.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여긴 어디고, 이 가마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나는 왜, 죽은 이 몸이 굶주린 채로 어딘가에 실려 가고 있는가.
발이 걷혔다.
***
"내리시오."
갑주 차림의 사내가 발을 걷고 서 있었다. 말투에 예의가 없었다. 끌려온 죄인을 대하는 말투였다. 서린은 내렸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 몸은 오래 굶주려 있었고, 밤새 어딘가에 실려 온 모양이었다.
높은 담장이었다. 검은 기와가 끝없이 이어졌다. 대문은 어른 키의 세 배는 됐다. 그 위로 흰 등이 줄지어 걸려 바람에 흔들렸다.
흰 등. 초상을 미리 준비하는 집이었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위해, 죽음을 먼저 걸어 둔 집.
서린은 그 등을 한 번 올려다봤다. 안의 사람이 죽는다는 데에 누군가 이미 표를 던진 셈이었다. 의원 열하나가 거기에 손을 보탰을 테고, 이 집의 식솔들도 속으로는 같은 표를 던졌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합의가 싫었다. 환자가 아직 숨을 쉬는데 초상부터 차리는 손들이, 늘 싫었다. 죽음을 예정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사람들은 손을 놓았고, 그녀는 그 손 놓는 순간을 수도 없이 봐 왔다. 매번 그 자리에서 혼자 손을 들고 있었다.
"의가의 딸이라 들었다."
사내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약초 물 든 손, 마른 어깨, 얇은 옷. 값을 매기는 눈이었다.
"네 앞으로 이 문을 들어간 의원이 열하나. 전부 두 손 들고 나갔다. 더러는 울며 나갔고, 더러는 들것에 실려 나갔지. 너까지 열둘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대장군께서 사경을 헤매신다." 목소리가 한 단 낮아졌다. "닷새 안에 일으켜 세워라."
그가 말을 끊었다. 끊은 자리가 말보다 더 위협이었다.
"네 어미와 어린 동생이 변두리에 산다더군. 의가 하나 멸문하는 데에는 닷새도 길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서린은 그 말을 의학적으로 들었다. 닷새. 데드라인. 환자 하나에 식솔 셋의 목숨이 묶인 처치. 실패 시 예후 멸문. 보호자 동의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거부할 권리도.
웃기지도 않았다.
살려야 산다. 그건 그녀가 평생 해 온 일이었다. 다만 이번엔, 못 살리면 그녀까지 죽는다는 게 달랐다. 처치대 위에 환자와 집도의가 함께 누운 셈이었다.
"환자부터 봅시다."
사내의 눈이 좁아졌다. 끌려온 계집이 떨지 않는 게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앞서 다녀간 열하나는 문턱에서부터 떨었을 것이다.
"안내하세요. 시간 없다면서요."
***
내실은 약 냄새로 절어 있었다.
탕약, 침향, 그 밑에 깔린 다른 냄새. 서린은 그 냄새를 알았다. 살이 썩기 직전의 냄새. 몸이 제 일부를 포기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코가 먼저 진단을 내렸다. 늦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침상 위에 사내가 누워 있었다.
컸다. 죽어 가는데도 컸다. 어깨가 침상을 가득 메웠고, 얼굴은 핏기 없이 깎여 있었으나 그 선이 무너지지 않았다. 깊은 눈두덩, 단단한 턱. 열에 들떠 갈라진 입술마저 흐트러지지 않았다. 사람이 이토록 천천히,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고 죽어갈 수도 있구나. 서린은 잠깐, 처치와 상관없는 그런 생각을 했다.
둘러선 늙은 의원들이 그녀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흰 수염, 두꺼운 약전, 손에 든 침통. 권위라는 것들.
"계집애한테까지 차례가 갔군. 이 댁도 이제 끝일세."
"대장군의 옥체에 손을 댄다? 죄가 두렵지 않으냐, 어린것이."
또 다른 의원이 약전을 덮으며 혀를 찼다. "맥이 이미 떠나려는 자리다. 헛바람 넣지 말고 물러나 있거라. 괜히 네 죄만 더한다."
세 번째 자가 비웃음을 보탰다. "열한 명이 못 한 걸 네가 한다고. 의가의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세워 보려는 게냐."
서린은 듣지 않았다. 이미 보고 있었으니까. 귀는 닫고 눈만 켰다. 말은 환자를 살리지 않았다. 살리는 건 늘 손이었다.
입술 색. 청회색. 손끝. 식었다, 끝에서부터 안으로. 호흡. 얕고 빨랐다. 가슴이 한쪽만 올라왔다. 오른쪽 흉곽이 반 박자 늦었다. 목의 핏줄이 굵게 도드라져 있었다. 기관이 한쪽으로 밀려 있었다.
이건 병이 아니었다.
옆구리에 덧댄 천을 눈으로 좇았다. 묵은 피가 배어 거뭇하게 굳어 있었다. 오래된 상처. 전장에서 받은 것이겠지. 아문 줄 알았던 자리가 안에서 곪았다. 갈비뼈 아래, 흉강에 무언가 차올랐다. 그 압력이 폐를 밀고, 심장으로 돌아갈 피의 길까지 누르고 있었다. 한쪽 가슴이 늦는 이유. 목의 핏줄이 부푼 이유. 전부 한 줄로 꿰어졌다.
긴장성 혈흉(血胸). 머릿속에서 단어가 정확히 떨어졌다. 손가락 하나 굵기의 바늘이면 됐다. 빼낼 자리도 보였다. 빗장뼈 아래 두 번째 갈비 사이.
자연사가 아니었다. 막을 수 있는 죽음이었다. 못 고칠 병이 아니라, 손쓰지 않아 죽어가는 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은 이미 그 일을 알고 있었다. 수백 번 했던 일이었다. 다만 형광등도, 흡인기도, 멸균포도 없는 곳에서. 소독약 한 병 보이지 않았다. 가진 거라곤 이 몸에 깃든 의가의 손과, 머릿속에 든 그녀 자신의 십 년이 전부였다. 그걸로 충분한지는 해 봐야 알았다.
해 보지 않으면 닷새 뒤에 넷이 죽는다. 침상 위의 환자 하나, 그리고 변두리의 셋. 산 사람을 앞에 두고 산수부터 하는 자신이 우습기도 했지만, 그게 그녀가 공포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숫자로 바꾸면 무서운 것도 처치 항목이 됐다.
셈은 간단했다. 망설일 자리가 아니었다. 필요한 건 속이 빈 바늘 하나와, 아무도 그녀를 끌어내지 않을 몇 분이었다.
"이 사람, 가슴에 피가 찼습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바깥으로 빼내지 않으면 오늘 밤을 못 넘깁니다. 침이든 바늘이든, 속이 빈 걸로. 지금 당장."
늙은 의원 하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수염이 흔들렸다.
"가슴을 찌른다? 산 사람의, 그것도 대장군의 가슴을, 네까짓 게?"
"그게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는 길이라면."
그녀의 말투는 의녀의 것이 아니었다. 이 방의 누구도, 그 누구 앞에서도 그렇게 말한 적 없었다. 좌중이 술렁였다. 갑주의 사내가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누군가 사람을 부르려 입을 열었다.
서린은 듣지 않고 침상으로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사내의 손목을 짚었다. 맥을 확인하려고. 처치 전에 기준선을 잡는 건 몸에 밴 순서였다.
맥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얕게나마 손끝에 걸리던 박동이, 그녀가 누른 바로 그 자리에서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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