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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팔다, 달을 사다

달다구리 · 30화

죽을 운명의 악역 세리나가 원작을 비틀며 살아남는 빙의 로판.

# 별을 팔다, 달을 사다 (REMAKE) ## 1화. 나 왜 여기 있어 --- 눈을 떴을 때 첫 번째로 든 생각은, *천장이 너무 높다*였다. 두 번째는, *나 이거 본 적 있는데*. 세 번째는 "아 씨." --- 거울이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세 걸음을 걸었더니 전신 거울이 나왔다. 금박 테두리에 높이가 내 키 두 배는 됐다. 귀족 취향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나는 없었다. 정확히는, 내가 아닌 얼굴이 있었다. 창백한 피부. 쇄골까지 흘러내린 은발. 눈 아래 옅은 다크서클과, 입술 끝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처진 생김새. 어떤 표정을 지어도 차갑게 보일 것 같은 얼굴. 나는 그 얼굴을 알았다. 아주 잘 알았다. 왜냐면 작년에 완결난 웹소설 『에라의 밤에 피는 꽃』에서 독자들한테 가장 많이 욕먹던 캐릭터의 얼굴이었으니까. "……세리나 볼테." 내 입에서 내 목소리가 아닌 소리가 나왔다. 낮고 서늘한 음색. 전형적인 악역 보이스. 나는 거울을 한 동안 바라봤다. 그러다 뒤로 돌아 침대에 다시 앉았다. 푹신한 침대였다. 귀족 침대는 역시 다르구나, 같은 생각이 어처구니없게 스쳤다. *정리하자.* 나 이새벽, 28세, 직장인, 어젯밤 퇴근 후 치킨 시켜놓고 폰으로 웹소설 정주행하다가 잠든 것까지는 기억난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웹소설 안에 들어와 있다. 주인공으로? 아니. 히로인 베프로? 아니. 카엘 오르반의 전 약혼녀이자, 히로인 레이나 달리온을 세 번 협박하고 두 번 함정 파고 마지막엔 카엘한테 마력 봉인당해서 왕국에서 쫓겨나는 역할로. 빌런으로. "하." 웃음이 나왔다. 웃긴 상황이 아닌데 웃음이 나왔다. 이건 뭔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뇌가 선택하는 방어기제라고 들었는데, 지금이 딱 그 상황인 것 같았다.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일단 숨을 쉬자.* *원작 내용 복기하자.* *그리고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짓 목록 만들자.* --- 원작 『에라의 밤에 피는 꽃』의 줄거리는 이렇다. 5급 마법사 레이나 달리온이 귀족 카엘 오르반과 임시 결속 계약을 맺는다. 처음엔 거래였다가 감정이 생긴다. 에라의 밤을 앞두고 온갖 위기가 터지고, 결국 두 사람이 자발적으로 영구 결속 계약을 맺으며 해피엔딩. 아름다운 이야기다. 나도 좋아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세리나 볼테가 하는 짓들이다. 레이나를 협박한다. 카엘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카엘은 자신의 것이라고. 레이나의 마법 도구를 망가뜨린다. 길드에 레이나에 대한 허위 신고를 넣는다. 그러다 마지막에 레이나를 직접 해치려다 카엘한테 딱 걸린다. 그 장면에서 카엘이 세리나를 향해 처음으로 냉정하게 말하는 대사가 이 소설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혔다. 나는 그 장면을 읽으면서 *당연하지, 쟤는 선 넘었잖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쟤가 됐다. "……절대 그 짓 안 한다." 혼자 중얼거렸다. *레이나 건드리지 않는다. 카엘 근처 얼씬도 안 한다. 최대한 조용히, 엑스트라처럼 산다. 원작 스토리가 제 궤도로 가도록 옆에서 살짝 밀어준다. 그러면 나는 봉인 안 당하고, 이 세계에서 무사히 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 하루 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 문제는 이튿날 아침에 시작됐다. 노크 소리가 났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부재중"을 선언하려다, 시녀가 들어오는 바람에 이불에서 나와야 했다. 시녀는 은쟁반에 편지 한 통을 들고 있었다. 나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발신인: 카엘 라네스 오르반. *오늘 오전 저택 응접실에서 면담을 요청합니다.* 눈이 잠깐 정지했다. 원작 복기. 이 시점에서 세리나와 카엘의 접점은... 있었다. 두 사람은 전 약혼자 관계니까. 파혼 후에도 가문 관계상 공식적인 자리에서 마주칠 일이 있었다. 이 면담은 아마 아마 원작 초반에 카엘이 세리나에게 "레이나 달리온을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하는 씬의 시작이었다. 나는 편지를 내려놨다. *안 가면 되잖아.* "볼테 영애, 일정이" "오늘 몸이 좋지 않다고 전해." 시녀가 잠깐 뭔가를 참는 표정을 했다. 아마 원래 세리나라면 이런 식으로 회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세리나는 카엘을 피하는 캐릭터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집착하는 쪽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시녀가 나갔다. 나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며 생각했다. 완벽하다. 오늘은 이렇게 넘어갔다. 내일도 몸이 안 좋을 수 있다. 모레도. 이 몸이 꽤 허약 체질이면 좋겠다. 그 생각을 하는 사이에 또 노크가 왔다. 이번엔 시녀가 아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좀 더 단호했다. 나는 이불 속에서 굳었다. "볼테 영애." 목소리를 들은 순간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었다. 나는 천천히 이불을 내렸다. 응접실로 찾아오라고 했는데 직접 왔다. 문 앞에 서 있는 남자. 짙은 갈색 머리, 회색 코트, 나를 보는 눈이 판단을 끝낸 사람처럼 차분했다. 카엘 오르반. 이 소설의 남주인공. 나를 봉인할 사람. "……." "몸이 좋지 않으시다고요." "…네." "그치고는 멀쩡해 보이시는군요." 나는 지금 이불을 목까지 당겨 쥔 상태로 카엘 오르반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이 상황이 원작 어느 챕터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원작의 세리나는 이불 속에 숨지 않는다.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카엘이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이 내 얼굴을 훑었다. 판단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확인하는 눈이었다. "레이나 달리온 마법사에 대해서." 원작 씬이다. 이 대화가 원작 초반에 카엘이 세리나에게 경고를 날리는 씬의 시작이었다. 원작의 세리나는 이 대화 이후 더 집착한다. 자존심이 건드려져서. 나는 그러면 안 됐다. "…알겠어요." 카엘이 멈췄다. "레이나 달리온 마법사한테 손 안 댈게요. 그 말 하러 오신 거잖아요." 침묵이 길었다. 카엘의 눈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게 끝입니까." "네." "왜요." 뜻밖의 질문이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몰라서 잠깐 카엘을 바라봤다. 원작의 이 씬에서 세리나는 '왜'라는 질문을 받지 않았다. 카엘이 경고하고, 세리나가 반발하고, 긴장감이 고조되는 씬이었으니까. 지금처럼 세리나가 순순히 수락하는 버전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카엘이 '왜'를 묻는 건 원작에 없는 리액션이었다. "그냥요." 내가 말했다. "그냥." 카엘이 되뇌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뭔가를 더 생각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볼테 영애." "네." "당신 요즘 많이 다릅니다." 내 심장이 조용히 떨어졌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드는 생각입니다." 카엘이 돌아섰다. 문 쪽으로 걸어가다 멈추지 않고, 그대로 나갔다. 문이 닫혔다. 나는 이불 속에서 천천히 무너졌다. *이틀째인데.* *이틀 만에 '당신 달라졌다'를 들었다.* 창밖 어딘가에서, 이 계절이 아닌 꽃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나는 그게 뭔지 알고 있었다. 결속 마력이 감정에 반응할 때 나타나는 현상. 누구 감정인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다음 화 2화: 악역 매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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