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황녀로 빙의했지만 힘을 숨기기로 했다
달빛서랍 · 107화
여섯 살에 죽을 단역 황녀 라엘리아로 빙의한 서른 살 독자가, 세 살짜리 몸으로 귀여운 척과 원작 지식을 무기 삼아 황실의 관심과 생존 루트를 설계하는 황실 생존 로판.
# 1화. 눈을 떠보니, 죽는 황녀였다
처음 며칠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스물아홉 해를 멀쩡한 성인으로 살던 사람이,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세 살배기 꼬맹이가 되어 있었으니까. 정신은 그대로인데, 몸이 영 말을 안 들었다. 다리는 짧아서 종종거려야 했고, 조금만 빨리 걸으려 하면 발이 엉켰고, 손은 작아서 물잔 하나도 두 손으로 받쳐야 했다. 무엇보다 키가 작으니 세상이 죄다 머리 위에서 흘러갔다. 어른들의 대화도, 탁자 위 물건도, 전부 까치발을 들어야 닿을까 말까였다.
더 서러운 건 따로 있었다. 말은 할 줄 알았다. 세 살이면 그래도 제법 또박또박 말할 나이니까. 문제는, 내가 아무리 멀쩡한 문장을 뱉어도 어른들 귀엔 그게 그냥 '아유, 우리 아기 말 좀 보소' 수준의 옹알이로 들린다는 거였다. 진지하게 "유모, 요즘 본궁 분위기가 어때?" 하고 물어도 돌아오는 건 "어이구 우리 황녀님 말도 잘하시네~" 하는 볼 꼬집기뿐. 스물아홉 평생, 누가 내 말을 이렇게까지 안 들어준 적은 없었다.
그래도 머리는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게 더 문제였다. 세 살짜리 몸뚱이에 다 큰 어른의 정신이 통째로 갇혀서, 나는 매일 생각만 굴렸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누구지. 왜 이렇게 됐지. 야근하다 사무실 의자에서 눈 감은 게 마지막이었는데.
답은 의외로 빨리 왔다. 유모라는 여자가 나를 어르며 흥얼거린 이름 덕분이었다.
"아이고, 우리 라엘리아 황녀님. 오늘도 잠을 안 주무시네."
라엘리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하게 식었다. 나는 이 이름을 안다. 아주 잘 안다. 죽기 직전까지 휴대폰을 붙들고 정주행하던 소설에서, 수십 번은 스쳐 지나간 이름이었으니까.
〈제국의 신녀〉. 대륙 동편을 삼백 년 다스린 카르세인 제국을 배경으로, 변방 신전에서 올라온 신녀가 주인공인 로맨스 판타지였다. 회사 점심시간마다, 퇴근길 지하철마다, 나는 그 소설을 읽으며 버텼다.
처음엔 그냥 우연이겠거니 했다. 라엘리아쯤이야 흔한 이름일 수도 있잖아. 그런데 유모의 입에서 '카르세인'이라는 국호가, '황녀'라는 호칭이 차례로 흘러나오자, 나는 더 이상 우연이라고 우길 수 없었다. 등에 식은땀이 한 줄 흘렀다.
빙의였다. 그것도 하필, 내가 읽던 소설 속으로.
그리고 라엘리아 폰 카르세인은 그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밤하늘 같은 머리칼의 막내 황녀'라는 한 줄 묘사가 전부인, 단역. 대사도 거의 없고, 얼굴 묘사도 제대로 없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배경. 독자였던 나조차, 이 캐릭터가 있었는지 가물가물할 정도의.
문제는 그 단역의 결말이었다.
라엘리아는 죽는다. 원작 56화, 황실의 정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그 화에서, 어른들의 권력 다툼에 불똥이 튀어 여섯 살에. 한 문단도 안 되는 분량으로, 조용히. '막내 황녀가 변을 당했다'는 한 줄과 함께.
나는 통통한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하나, 둘, 셋. 지금 세 살이니까, 그 결말까지 딱 삼 년.
세 살짜리가 천장을 보고 누워서, 제 사망일까지 남은 햇수를 손가락으로 꼽고 있었다. 누가 보면 기괴한 광경이었겠지만, 나는 진지했다. 한 번 죽어봤으니 안다. 죽음은 생각보다 갑작스럽고, 생각보다 시시하다. 두 번은, 정말이지 사양이었다.
삼 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그 안에 나는, 정해진 결말을 어떻게든 비틀어야 했다. 방법은 아직 모른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가만히 누워 죽음을 기다릴 생각 따위, 추호도 없다는 것.
* * *
깨어난 첫날부터, 나는 내 처지를 파악하는 데 모든 신경을 썼다. 몸은 굼떴지만, 머리까지 굼뜬 건 아니었으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처지는 별로였다.
내가 사는 곳은 황궁의 본궁이 아니었다. 정원 끝, 회랑을 몇 번이고 꺾어 들어가야 나오는 외진 별궁. 벽지는 빛이 바랬고, 창은 북향이라 한낮에도 볕이 짧게 들었다 빠졌다. 시중드는 사람이라곤 늙은 유모 하나와 어린 시녀 둘이 전부. 황녀의 처소라기엔, 잊힌 창고에 가까웠다.
천장 한 구석엔 거미줄이 한 가닥 늘어져 외풍에 흔들렸고, 장식장 위 은촛대는 닦은 지 오래라 거뭇하게 변색돼 있었다. 어쩌다 볕이 들면 먼지가 부옇게 떠다니는 게 보였다. 어느 밤엔 벽 안쪽에서 쥐가 달그락대는 소리가 났는데, 시녀들은 익숙한지 깨지도 않았다. 명색이 황녀의 침소인데, 전생에 자취하던 내 원룸보다도 관리가 안 됐다. 코끝엔 늘 오래된 천과 식은 촛농 냄새가 옅게 배어 있었다.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원작에 적혀 있었으니까.
나를 낳은 황후는, 나를 낳다가 죽었다. 그 뒤로 황제는 막내딸을 볼 때마다 죽은 아내가 떠오른다며 멀리했고, 멀리하다 못해 아예 시야 밖으로 치워버렸다. 이 외진 별궁이, 그 '치워둔' 자리였다.
아버지가 그러니 위의 형제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황태자인 첫째 카엘, 검을 든 둘째 리오, 마탑의 천재라는 셋째 이안. 셋 다 막내가 이 궁 어느 구석에 처박혀 사는지 관심도 없었다. 첫째는 황좌를, 둘째는 전장을, 셋째는 마탑을 저마다 제 야망과 제 싸움으로 바빴고, 막내 따위는 그들의 세계에 처음부터 없는 존재였다. 원작에서 이 셋이 라엘리아를 입에 올린 건, 그 애가 죽은 뒤의 짧은 한 줄이 전부였다.
'…이거 완전, 무관심 종합 선물 세트네.'
나는 빛바랜 천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한숨도 옹알이로 새어 나가, 듣는 유모는 그저 귀엽다고 웃었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별궁에 틀어박혀 지내는 동안, 나는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했다. 듣는 것. 유모는 어린 시녀들과 수다 떠는 걸 좋아했고, 어린애 하나쯤 곁에 있다고 입을 다물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른들은 으레 코흘리개 앞에선 경계를 푸니까. 덕분에 나는, 방구석에 앉아 인형이나 만지작거리는 척하면서 온 신경을 귀에 모을 수 있었다. 나는 자는 척 눈을 감은 채, 그들이 흘리는 이야기를 한 조각씩 주워 모았다. 본궁에서 무슨 연회가 열렸다더라, 어느 대신이 황태자께 미운털이 박혔다더라, 둘째 황자님이 또 변경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오셨다더라. 쓸모없어 보이는 잡담도, 모아 두면 한 장의 지도가 됐다.
상황 정리. 나는 죽을 운명의 단역이고, 삼 년 뒤 정쟁에 휘말려 죽으며, 그날까지 가족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한다. 가진 패는 하나. 이 소설을 읽은 독자라는 것. 즉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안다는 것.
문제는, 그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였다. 미래를 안다고 해서, 세 살짜리가 정쟁의 칼날을 혼자 피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살고 싶으면 내 편이 필요해.'
날 아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생긴다면. 삼 년 뒤 그 사건에서, 나를 빼내줄 손이 하나라도 생긴다면. 그게 내가 죽지 않을 유일한 길이었다.
물론, 말처럼 쉬울 리 없었다. 상대는 죽은 아내 생각에 날 외면하는 아버지와, 동생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오빠 셋이다. 난이도로 치면, 거래처 갑부장님 마음 돌리기보다 백 배는 어려운 영업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목숨이 걸렸는데. 못 할 것도 없지.
하지만 그 전에. 내 편을 만들려면, 이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누가 어디 있고, 어디가 위험하고, 어디로 가면 안 되는지. 책으로 읽은 지도와 실제 궁은 다를 테니까.
말하자면, 정찰이 필요했다. 발로 뛰는 현장 답사. 전생에 시장 조사라면 이골이 나도록 해봤다. 대상이 소비자에서 황실로 바뀌었을 뿐, 본질은 같았다. 모르면 죽고, 알면 산다.
* * *
기회는 그 별궁의 나른한 오후마다 찾아왔다.
점심을 먹은 유모는 늘 창가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았고, 어린 시녀 둘은 빨래며 잔심부름으로 자리를 비웠다. 그 틈이, 내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 시간이었다. 나는 며칠에 걸쳐 그 패턴을 관찰했다. 유모가 졸기 시작하는 시각, 시녀들이 자리를 비우는 간격, 복도에 인기척이 끊기는 때. 직장 다닐 때 상사 자리 비는 타이밍 봐서 농땡이 치던 짬밥이, 설마 이런 데 쓰일 줄이야.
나는 작은 침대에서 기어 내려와, 종종걸음으로 문을 향했다. 세 살짜리 다리는 걷는 데엔 무리가 없었지만, 짧고 통통해서 빠릿빠릿하진 못했다. 무게중심이 위태로워서, 빨리 가려다 두어 번 발이 엉켜 휘청했다. 어른의 머리로 아이의 몸을 운전하는 건,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문까지는 열댓 걸음. 어른에겐 댓 걸음일 거리가, 이 짧은 다리론 제법 멀었다. 나는 종종종 걸어 문 앞에 다다랐다. 중간에 한 번 카펫 끝에 발이 걸려 휘청했지만, 벽을 짚고 균형을 잡았다. 마음은 성큼성큼인데 몸은 아장아장이라, 영 답답한 노릇이었다.
문틈은 다행히 살짝 열려 있었다. 시녀가 닫는 걸 깜빡했는지, 손가락 두 개쯤 들어갈 만큼. 나는 그 틈에 작은 손을 끼우고, 온 체중을 실어 밀었다.
끼익.
문이 소리 없이, 한 뼘 더 열렸다.
그 너머로, 처음 보는 회랑이 길게 뻗어 있었다. 빛바랜 별궁과는 딴 세상이었다. 그곳엔 오후 볕이 길게 깔려 있었고, 대리석 바닥은 햇살을 받아 따뜻하게 윤이 났다. 늘어선 기둥 사이로 정원의 푸른빛이 어른거렸고, 저 끝 어딘가에서 낯선 새소리 같은 게 아득히 들려왔다. 닫힌 별궁 안에서만 살던 내겐, 그 모든 게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기둥마다 황금빛 사자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책으로만 읽던 카르세인의 상징을 글자가 아닌 실물로 마주하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아, 나 진짜로 여기 떨어진 거구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솔직히, 조금 설레서. 죽을 운명이고 뭐고, 이 좁은 별궁에만 갇혀 지냈더니, 한 뼘 열린 문 너머가 무슨 신대륙처럼 보였다.
'좋아. 1차 정찰, 개시.'
나는 뒤를 한 번 돌아봤다. 유모는 여전히 창가 의자에서 곤히 졸고 있었다. 가볍게 코까지 골면서. 저 늙은 유모는, 이 궁에서 유일하게 내게 무심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가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깨우면 분명 기겁하며 날 도로 침대에 눕힐 테니 미안하지만 지금은 푹 자고 있어 줘야 했다.
다시 앞을 봤다. 따뜻한 햇살이 깔린,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회랑. 문턱 너머로 조심스레 한쪽 발을 내딛자, 맨발에 닿는 대리석이 의외로 따뜻했다. 서늘하기만 하던 별궁 바닥과는 달랐다. 그 작은 온기가, 이상하게 용기를 줬다.
그렇게 나는, 삼 년 뒤 내 무덤이 될 황궁을 처음으로, 정찰하러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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